8세기 말, 신라에서는 왕위쟁탈전이 빈번히 발생하여 정치가 혼란해졌고 전국 각지에서는 조세 수취에 반발하여
농민 봉기가 발생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지방 호족들이 신라 조정으로부터 독립하여 각자 자신의 세력을 키웠는데 그 중에서도
견훤[후백제]과 궁예[후고구려]가 가장 강한 세력을 구축하였다.
궁예가 민심을 잃고 쫓겨나고 이에 918년 송악 지방의 호족 출신이었던 왕건은 신하들의 추대를 받아
임금의 자리에 올라 국호를 고려, 연호를 천수(天授)라고 하고,
송악(개성)으로 도읍을 옮김(919년 송악 천도)
태조의 뒤를 이은 혜종과 정종 때에는 왕권이 불안정하여 왕족들과 외척들 사이에 계승 다툼이 일어났다.
이러한 왕권의 불안정은 태조가 후삼국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호족 세력을 규합하기 위하여 취하였던
혼인 정책 때문에 나타난 부작용이었다.
이어 고려의 제4대 황제 광종이 즉위 한다
광종 왕소는 925년에 태조의 넷째 아들이자 신명순성왕후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형 태자 무와 태자 태, 태자 요가 있었으므로 그는 왕위계승권에서 멀리 있었다.
그러나 혜종이 병약하고, 동복 형인 태자 태가 일찍 요절하면서 그는 형 요와 함께 유력 왕위계승권자가 되었다.
왕소는 성격이 호탕하고 과감하면서도 한편으로 신중하였다.
태자 시절에 그는 정종과 더불어 왕실 세력의 핵심 인물이었고, 박수경·박수문 형제와 왕식렴 등의
서경 세력과도 친분이 두터웠다.
그 때문에 왕규와 박술희가 이끄는 개경 세력을 제거하는 데 많은 역할을 하였으며,
정종의 즉위에도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왕위를 두고 벌어진 암투극 사이에서 호족들의 도움을 받아 생명을 보전할 수 있었지만
그는 각자 자기 가문의 외손이나 연고자를 왕위로 끌어올리려는 호족들을 보고 제거해야 될 대상
또는 잠재적인 적으로 보고 있었다.
태조는 호족들을 견제할 목적으로 이복남매들 사이의 족내혼을 시켰는데,
그는 이복 여동생이자 신정왕후 소생인 대목왕후 황보씨와 결혼하였다.
이복 여동생이었지만 그녀는 외가의 성을 따랐고 외할아버지 황보제공의 성을 따라 황보씨라 칭하게 되었다.
대목왕후에게서 2남 3녀를 두었는데, 둘째 아들 효화태자는 요절하고 첫째 아들 태자 주가 뒷날의 경종이 된다.
딸은 천추전부인, 보화궁부인, 흥덕원군부인이 있는데 셋째딸인 흥덕원군부인은 흥덕원군 왕규와
결혼하여 딸을 두었으나 다시 성종에게 재가한다.
태조가 자식들을 이복 형제끼리 결혼시킨 것은 신라 왕족의 풍습에 따른 것이었다.
이는 왕실 혈통의 순수성을 유지하고 동시에 왕권을 안정시키기 위한 배려였다.
왕이 족외혼을 했을 경우 왕권이 외척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 이라는 왕건의 계산이 작용했다.
그는 이복형 혜종과도 친분을 가지면서 서경세력과 혜종 사이에 교량 역할을 하였다
이는 혜종이 서경세력과 화합을 도모하기 위해 자신을 딸을 왕소의 두 번째 부인으로 시집 보낸 것으로도
확인된다.
광종은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실현하고자 하는 야심이 강한 인물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중앙군을 능가하는 군사력을 가진 호족의 제거를 계획 하였다.
즉위 초기에는 호족들의 지지가 필요하였기에 호족들에게 권한을 부여했다.
그러나 태자 시절 호족들이 자기 가문의 연고가 있는 태자를 위에 올리기 위해 암투를 벌이는 것을 지켜본
그는 호족들의 숙청을 결심한다.
결국 개국 초 수백에 이르던 호족들이 대부분 숙청되어 불과 수십여명 밖에 남지 않았다고 한다.
사실 얼마만큼의 호족이 죽었는지는 기록의 부실로 확실하게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고려 성종 때 최승로가 '태조를 모시던 구신이 40여명 밖에 남지 않았다'는 발언을 한 대목을 보면
숙청 과정에서 호족들이 상당히 큰 타격을 입었던 것으로 보인다
광종은 고려 왕조 성립 초기의 공신들과 호족들의 세력을 약화시켜 왕권의 강화와 중앙집권적 국가체제 확립,
국가의 재정 기반 안정을 위한 과감한 개혁 정책을 추진하였다.
광종은 왕권의 강화에 걸림돌이거나 자신에게 도전한다는 의심이 드는 인물에게는 냉혹하였다.
광종은 호족과 대신들 뿐만 아니라 골육과 종실에 대해서도 왕권 강화에 장애요소가 된다고 생각하면
과감히 제거하였다
광종은 혜종의 아들 흥화궁군과 동복 형인 정종의 아들 경춘원군을 역모에 관련되었다 하여 처형시키고,
심지어는 자신의 아들이자 태자인 주(경종)를 의심할 정도로 역모에 민감해졌다
- 광종이 대숙청을 단행한 까닭은 그들을 죽이지 않으면 자신이 죽기 때문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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